전주국제영화제에 갔다가 한순간에 꿈이 날아가버린 청년이 있다.
이은호(34) 씨는 지난달 30일 오전 7시 30분쯤 전북 전주시 덕진구의 한 도로에 서 있었다. 전주국제영화제를 보러 온 길이었다. 이 씨는 아침 명물인 물안개를 촬영하려고 일찍이 아중호수를 찾았다.
초행길인 탓에 이 씨는 아중호수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내리지 못하고, 한 정거장을 더 가 종점인 전주시 양묘장에서 하차했다.

호수로 가려면 길을 건너야 했기에 이 씨는 횡단보도 근처에 있는 신호버튼을 눌렀다. 이 신호버튼 위에는 ‘버튼을 누르면 신호가 바뀐다’는 안내 문구가 쓰여 있었다.
보행자가 많은 도심에는 이런 시설이 별로 없지만,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이들이 드문 도로에는 원활한 차량흐름을 위해 버튼이 설치돼 있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씨가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정지 신호는 보행 신호로 바뀌지 않았다.
5분이 넘는 기다림 끝에 이 씨는 맞은 편에서 한 노인이 정지신호에 도로를 가로질러 오는 것을 보게 됐다. 정상적인 버튼이었다면 신호가 바뀌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 씨 또한 시설 고장을 확신하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이때 도로를 달리던 1t 트럭은 보행자를 피하지 못하고 이씨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이 씨는 이 사고로 온몸에 골절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누나 이은영(48) 씨는 “너무 많은 곳이 부러져서 전치 몇주인지 진단도 받지 못했다”고 울분을 터트렸다.
뒤늦게 알려진 사실은 동생 이 씨가 누른 신호버튼은 이미 고장 난 상태였고, 같은 기능을 하는 버튼이 2∼3m 떨어진 곳에 새로 설치된 상태였다.
새로 설치된 신호버튼 위에는 안내 문구가 없어 인근 주민이 아니면 이를 눌러야 신호가 바뀐다는 사실을 알기 어려웠다. 관광객인 이 씨 또한 안내 문구가 있는 버튼만 누른 것으로 파악됐다.

10일 이 씨 남매는 전북대병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누나 이 씨는 지자체와 경찰의 교통시설 관리 부실을 성토했다.
그는 “동생은 전주국제영화제를 너무 사랑해서 벌써 7년째 전주를 방문하고 있다”며 “물안개를 보겠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아중호수를 찾은 것뿐인데 언제 다시 정상적 삶을 찾을 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울먹였다.
그러면서 “신호버튼이 고장 났다면 철거하거나 안내 문구를 새로 설치한 버튼으로 옮겼어야 옳은 것 아니냐”며 “신호를 지키라고 말할 거면 신호등을 제대로 만들어달라. 그렇지 않으면 동생처럼 목숨을 담보로 길을 건너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경찰과 전주시는 기자회견 내용을 전해 듣고 구체적 상황을 파악한 뒤, 고장 난 신호버튼 철거 등 필요한 조처에 나서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