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일 때면 서울 시내 거리마다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공연 소식이 잦아진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일상의 피로를 덜기 위해 무대를 찾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계절의 변화와 함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떠오르는 가운데 최근 주목받은 작품이 하나 있다. 인기 웹툰을 바탕으로 제작된 CJ ENM 드라마 ‘정년이’가 2025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방송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은 12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는 지난 1년 동안 국내에서 제작·방송된 우수 프로그램과 방송문화 발전에 힘쓴 개인, 단체를 대상으로 대상을 포함한 여러 부문을 선정했다. 올해는 총 183편의 작품이 응모해 예심과 본심을 거친 끝에 ‘정년이’를 포함한 15개 작품이 최종 수상작으로 이름을 올렸다.
‘정년이’, 여성 국극의 전성기 이끈 두 천재의 성장기
드라마 ‘정년이’는 지난해 10월 첫 방송을 시작했다. 작품은 잊혔던 한국의 전통 공연 예술인 여성 국극의 짧고 화려했던 전성기에 주목한다.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의 창립을 시작으로 오직 여성만으로 구성된 국극단이 탄생했다. 여성 국극은 대중의 관심을 끌며 빠르게 성장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도 그 인기는 식지 않았다. 전쟁 이후 1950년대 중후반, 여성 국극은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영화와 텔레비전 등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서 여성 국극은 점차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됐다. 이제는 그 존재조차 잘 모르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한때 이 무대에서 관객의 환호와 열정, 배우들의 웃음과 눈물, 치열한 갈등이 공존했다. 작품은 무대 위에서 만난 두 국극 천재, 정년과 영서의 성장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국극 무대를 배경으로 현실과 꿈 사이를 그리다
‘정년이’는 1950년대 후반 한국전쟁 직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도시 곳곳에는 전쟁의 상처가 깊게 남아 있었으나, 그 안에서도 희망과 생명력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극 중에서 정년이와 영서를 비롯한 젊은 배우들은 포기하지 않고 각자의 꿈을 좇는다. 어둡고 힘든 시절에도 무대를 향한 열망과 끈기를 잃지 않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드라마는 찬란한 삶의 한순간을 기록한다.
주인공 윤정년은 남다른 판소리 재능을 지닌 소녀다. 넓은 음역, 풍부한 감정 표현력, 어릴 때부터 이어진 소리 사랑이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집안에서는 어머니가 소리를 극도로 반대하며 매질과 야단을 반복하지만 정년은 이를 피해 몰래 소리를 이어간다.
장터에서 소리를 부르며 용돈을 벌기도 하고, 모든 일에 악착같이 임하며 주변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목포를 벗어난 적 없는 정년의 일상은 국극 배우 옥경을 만나면서 급격하게 변화한다. 정년은 옥경을 통해 국극의 세계에 눈을 뜨고 서울의 매란국극단에 입단하게 된다. 처음부터 남역 배우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운 정년은 이곳에서 옥경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되지만, 단원들의 질투와 냉대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옥경의 따뜻한 배려를 받으며 버티던 정년은 룸메이트 영서와의 관계에서 큰 벽에 부딪힌다. 영서는 명창의 지도를 받아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인물로, 실력도 태도도 완벽에 가깝다. 하지만 정년의 타고난 소리와 몰입력, 연기 실력 앞에서 불안과 질투를 감추지 못한다. 무대에서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는 자신의 약점을 자각하며, 정년에게 점점 더 신경이 쓰이게 된다. 반대로 정년 역시 영서의 탄탄한 기본기와 존재감에 자극을 받으며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는 관계를 만들어간다.
국극단을 이끄는 강소복(라미란)은 카리스마와 원칙을 겸비한 인물이다. 과거 여성 명창으로 이름을 알렸던 소복은 세간의 편견을 이겨내고 여성 국극단을 설립했다. 정기공연, 순회공연, 연구생 무대까지 직접 챙기며, 단원들에게는 엄격한 지도자로 알려져 있는 동시에 단원들의 버팀목 역할도 놓치지 않는다.
어린 시절 함께 수련했던 천재 공선의 재능 앞에서 좌절과 열패감을 경험했지만, 결국 그의 실력을 인정하며 가까운 친구로 받아들인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소복의 앞에 정년이란 새로운 인재가 등장하면서 다시 한번 변화가 찾아온다.
여성 국극은 1950년대 중반, 전쟁 직후의 암울한 시대에도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전성기를 누렸지만, 대중문화의 변화 속에서 그 자리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제는 국극의 존재조차 희미해진 시점에서 드라마 ‘정년이’는 당시 무대 위에서 꿈을 키운 인물들의 삶을 재조명했다.
작품은 방송 첫 회 4.8%의 시청률로 출발해 꾸준한 입소문과 화제성을 이어가며 마지막 회에는 16.5%를 기록했다. 이는 tvN 기준으로 역대 시청률 9위에 해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