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후반기 애록고지의 사투, 파격적 연출과 흥행 저력

2011년 개봉한 영화 ‘고지전’은 한국 전쟁 영화의 결을 바꾼 작품으로 꼽힌다. 기존 수많은 국산 전쟁 영화들이 6.25 전쟁 초반의 북한군과의 격돌이나 낙동강 전선 혹은 인천상륙작전 등 극적인 공방전과 역사적 분기점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영화는 전쟁 후반부의 교착 국면과 그 속에서 벌어진 최전방 애록고지(AERO-K) 전투를 정면으로 다루며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전쟁의 끝을 목전에 둔 시점, 기록되지 않은 채 사라져 간 병사들의 마지막 숨겨진 사투는 영화적 연출력과 만나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휴전협상 속 가려진 마지막 사투, ‘애록고지’의 비극
영화의 배경은 휴전 협상이 막바지 난항을 거듭하던 1953년 2월의 동부 전선이다. 교착전이 한창이던 애록고지에서 전사한 중대장의 시신에서 아군의 총알이 발견되는 의문의 사건이 발생한다. 상부는 영토가 아닌 적과의 내통을 의심하고 방첩대 중위 ‘강은표'(신하균 분)에게 현장 조사를 명령한다. 은표는 지옥 같은 최전방인 애록고지에 도착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랜 친구 ‘김수혁'(고수 분)과 재회하게 되는데 과거 유약한 학생이었던 수혁은 불과 2년 만에 이등병에서 중위로 특진하며 고지 위 악어중대의 실질적인 리더가 되어 있었다.

악어중대의 모습은 비장함을 넘어 기괴함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병사들은 신임 중대장에게 경례조차 하지 않고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인민군 군복을 덧입는 일도 예사였다. 부대 안에는 갈 곳 없는 전쟁고아들이 머무르고 서른도 되지 않은 갓 스무 살의 청년 신일영(이제훈 분)이 대위 계급을 달고 중대를 지휘하는 등 비정상적인 광경이 이어진다. 혼란 속에서 은표는 고지 탈환 작전에 투입되고 무능하고 무리한 작전을 지시하는 신임 중대장 탓에 부대는 전멸 위기에 놓인다. 이 대목에서 베테랑인 대위 신일영과 중위 수혁의 독단적인 작전으로 겨우 위기를 모면하지만 군 내부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된다.

결국 사건은 중공군과의 함화공작 전투 중 폭발한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중대원들을 불신하던 중대장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중사 오기영(류승수 분)에게 사살 위협을 가하며 전장의 공포를 자극한다. 그 순간 수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군 상관인 중대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눈앞에서 벌어진 명백한 하극상과 상관의 죽음,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은폐하는 중대원들의 무표정한 모습에 은표는 깊은 당혹감과 충격을 받는다. 이런 연출은 미국 전쟁 영화인 ‘햄버거 힐’의 허무주의적인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저격수의 묘사와 설정은 미묘하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자켓’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철저한 고증과 독창적 연출, 한국 전쟁 영화의 새 지평
특히 ‘고지전’은 한국 영화에서 쉽게 다루지 않던 아군 사살 즉 ‘프래깅(Fragging)’을 주저 없이 묘사해 해외 시장에서도 화제가 됐다. 2012년 1월 미국에서 소규모로 개봉했을 당시 현지 관객과 평단은 호불호가 갈리는 반응 속에서도 프래깅 장면에 대해 상당한 신선함과 놀라움을 표현했다.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제2차 세계대전식 미군 장비로 무장한 동양인들의 전쟁이라는 점도 흥미 요소였다. 2차 대전 종전 후 10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발발한 한국전쟁과 이후의 베트남전쟁까지 한국군은 미군과 거의 유사한 군장을 사용했기에 미국 관람객들은 화면상 동질감을 느끼며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고지전’은 뛰어난 소부대 전투 묘사와 높은 퀄리티의 전투 장면을 자랑한다. 영화 제작진은 빼앗긴 고지를 되찾기 위해 경사면을 기어오르는 악어중대와 이를 사수하려는 인민군 간의 처절한 사투를 밑에서 위로 쳐다보는 카메라 워크로 담아내 고지 전투가 가진 지형적 공포를 끌어올렸다.

또한 야음을 틈타 기괴한 나팔 소리와 함께 밀려오는 수많은 중공군의 움직임을 번개 불빛이 작렬할 때마다 간헐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은 전장의 공포를 적나라하게 전달하며 많은 호평을 이끌어냈다. 미술 스태프들의 장인정신 역시 돋보인다. 영화의 주요 무대인 분침호와 참호 세트는 순수미술 전공 출신의 스태프들이 직접 세팅하고 작업하여 사실감을 더했다. 간혹 화면에 구형 봉합식 검은색 전투화 밑창이 노출되는 옥에 티가 있지만 병사들이 착용한 넝마 수준의 군복 재현 등 전반적인 고증과 시대적 재현은 무리 없이 완성됐다.
쟁쟁한 경쟁작 틈바구니서 294만 관객 동원, 안방극장도 점령
이 같은 높은 완성도로 영화 ‘고지전’은 제3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신인남우상을 휩쓸며 당대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극장 개봉 당시에는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 2부’ ‘퀵’ 등 안팎으로 쟁쟁한 경쟁작들과 정면 충돌하면서 개봉 시기를 잘못 잡았다는 우려와 아쉬움의 목소리도 나왔으나 최종 관객 수 294만 5151명을 기록하며 치열한 박스오피스 경쟁 속에서도 선방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극장 종영 이후 2차 시장에서도 꾸준한 흥행을 이어 가며 전쟁의 참상을 가장 냉철하고 인간적인 눈으로 그려 낸 명작으로 오늘날까지 관객들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